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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문화연구소 칼럼(전문수록)] '우연한 바리새인들'(Accidental Pharisees)과 위그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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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기록문화연구소 작성일21-07-28 00:00 조회2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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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전문] 우연한 바리새인들과 위그노

미국 노스코스트교회 담임 래리 오스본 목사는 ‘우연한 바리새인들(Accidental Pharisees)’이란 독특한 제목의 책을 썼습니다. 국내엔 ‘당신의 열심이 위험한 이유’(새물결플러스)로 번역·출간됐습니다. 오스본 목사는 우연한 바리새인은 ‘최선의 의도와 하나님을 높이고자 하는 강한 열망에도 불구하고, 부지불식간에 열성적 믿음의 모형을 추구하고, 따라서 스스로는 섬기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알고 보면 주님의 일을 방해하고 마는 당신과 나와 같은 사람’이라고 규정합니다. 우연한 바리새인들의 특성을 몇 개 들어보면 그들은 말씀에 아주 열정적입니다. 늘 말씀을 연구하는 일을 즐기며 깊이 파고듭니다. 일반적인 그리스도인들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며 스스로에게 나머지 사람들을 보호해야 할 영적 감시견으로서의 의무를 부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삶의 변화는 지극히 미약합니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열성적 신자인 우연한 바리새인들로 인해 복음 전파는 약화됩니다.
물론 우연한 바리새인들에 대한 오스본 목사의 정의에는 반론의 여지도 있지만 지금 한국 교회 내에는 ‘사역이란 이름의 중독’에 빠져 있는 ‘우연한 바리새인들’이 적지 않은 듯합니다. 오스본 목사의 지적대로 그것이 한국 교회를 약화시키는 한 원인일지도 모릅니다. 현대 교회는 자체적인 운영을 위해서 사역이란 바퀴를 쉼 없이 돌리고 있습니다. 각종 세미나나 성경공부 모임, 특별새벽기도집회 등은 그 좋은 이유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사역이란 이름의 중독을 부추기는 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각종 사역을 통해 ‘우연한 바리새인들’의 영적 아드레날린 수치는 올라가고 전투의식은 고취됩니다. 그러나 그 전투의식 고취 자체가 믿음의 본질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하는 많은 일들이 그저 교회를 유지, 발전시키는 ‘교회 일’이지 주님이 진정으로 원하셨던 ‘주의 일’은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난 세월동안 한국 교회는 ‘우연한 바리새인들’에게 거침없이 ‘예배란 이름의 면죄부’를 주었습니다. 예배를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며 종말론적인 의식으로 삶을 사는 것이 중요했지만 하나님과의 임재는 부재한 가운데 한 주일에 여러 번 ‘치러내는’ 예배와 공적 사역에 참여했다는 의식 속에서 우연한 바리새인들은 마음의 위안을 찾습니다. 이것이 예배란 이름의 면죄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비대면 예배가 보편화됐습니다. 이 글을 쓰는 시점에 한국 교회는 바이러스의 확산으로 예배당에 성도들은 한 명도 참석하지 못하고 온라인으로만 참여하는 완전한 비대면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비대면 예배를 드리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며 시급히 서로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예배드리며 교제하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나 대면 예배냐, 비대면 예배냐의 문제가 중요한 논점은 아닐 것입니다. 예배를 대하는 우리의 마음자세, 마음자리가 가장 중요합니다. 우리가 간절히 하나님을 추구하는 진정한 예배자라면 대면 예배건, 비대면 예배건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지금 시대 우리가 반드시 돌아봐야 할 믿음의 선배가 바로 위그노들입니다. 프랑스의 개신교도들을 통칭하는 이름인 위그노들은 500년 가까이 박해를 받았지만 결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어떤 경우에도 예배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동굴이나 광야로 피해야 할 때에도 이동식 강대상을 마련하면서까지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드리다 발각돼 교수형이나 화형에 처해져도 예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보이는 조직화된 예배당에서만 예배드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거친 산이나 비밀스러운 조그만 방, 감옥에서도 위그노들이 들어가는 자리는 예배당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들 자체가 살아 있는 예배자들이었습니다. 더 이상 공간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믿음을 빛나게 했던 것은 예배당이 아니라 예배에 대한 그들의 진정한 자세였습니다.
위그노들이 만일 지금과 같은 코로나 시대에 대면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비대면 예배를 드린다면 그들은 어떻게 했을까요? 온 마음과 정성을 다했을 것입니다. 컴퓨터 앞에서도 옷매무시를 가다듬고 온 가족이 모여 하나님이 그 자리에 함께 계시는 것처럼 예배드렸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저 종교성이 강한 ‘우연한 바리새인들’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만난 참 신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났기에 비진리에 저항하고 양심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저항하고, 복음을 위해 저항함으로서 결국 세상을 변혁시키는 주체가 되었습니다. 똑같은 종교란 이름으로 그들을 박해했던 박해자들은 사라졌어도 위그노들의 불굴의 신앙은 세대에서 세대를 넘어 지금 우리에게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어쩌면 위그노를 박해했던 자들이야말로 종교적 열심에만 충만한 ‘우연한 바리새인들’의 전형이었을지 모릅니다.
지금 우리가 위그노들을 알아야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부흥은 세미나나 각종 연구를 통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한국 교회에 대한 각종 통계지표는 갈수록 나빠지고 있습니다. 교회의 매력은 떨어지면서 전체 국민들의 대 교회 신뢰도는 극히 낮아졌습니다. 다음 세대는 교회를 떠나고 있으며 교회 개척은 바위에 계란을 던지는 것과 같이 무모한 일처럼 여겨지고 있습니다. 영적 자신감도 사라지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그런 통계지표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그런 것들은 깡그리 무시해도 됩니다. 오히려 이런 시대일수록 더 본질에 집중해야 합니다. 예배당에 ‘우연한 바리새인’들로 가득한 교회보다 통계수치에는 잡히지 않지만 보잘 것 없는 초라한 장소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추구하는 ‘한 명의 진정한 이 시대의 위그노’가 교회를 변혁하고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정말 그분을 믿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분은 만군의 주님으로 능치 못할 일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분이 하시면 하십니다. 그분이 한국교회에 부흥을 주신다면 각종 통계수치와는 상관없이 부흥을 주실 것입니다.
감사하게도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하는 소중한 믿음의 역사, 믿음의 증인들이 있습니다. 위그노들처럼 말입니다. “기록하고, 기억하자”는 모토를 지닌 기록문화연구소가 2021년에 위그노를 주목하며 그들을 연이어 소개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에게서 우리가 찾는 답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입니다. 위그노들을 기억합시다. 그들이 코로나바이러스의 시대를 사는 한국 교회와 성도들에게 간절히 전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을 붙잡아야 합니다. 그들은 복음을 저버리며 잠시 편안히 사는 것보다 비록 죽음에 처하더라도 진리를 추구하며 영원히 사는 길을 좇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에게 기억되었고, 믿음의 후배들인 우리에게 기억되었습니다. 한국 교회가, 아니 우리 모두가 지금 위그노처럼 살기를 다짐하고 그렇게 살기위해 노력한다면 코로나바이러스의 시대는 한국 교회 부흥의 새로운 출발점이 될 것입니다. [기록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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